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펠로폰네소스 전쟁 (문단 편집) === 1차 펠로폰네소스 전쟁(기원전 460~기원전 446)과 일시적인 평화 === 1차 펠로폰네소스 전쟁은 아테네가 코린트와 분쟁 중이던 메가라와 동맹을 맺으면서 시작되었다. 메가라는 코린트 지협의 요충지에 위치하고 있어서, 펠로폰네소스 동맹군이 육로로 오는 것을 봉쇄할 수 있는 요충지였다.[* 사실 메가라를 확보하는 것만으로도 코린트 지협을 봉쇄할 수 있었을지는 학자들마다 의견이 갈린다.] 한편 기원전 460년 아테네는 페르시아가 지배하고 있던 이집트의 반란을 지원하기 위해 대규모 원정군을 보내었기 때문에 전력이 분산되어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테네는 일련의 해전에서 모두 승리를 거두었을 뿐만 아니라, 메가라를 공격해온 코린트를 격퇴하기 위해 너무 어리거나 나이가 많은 시민들까지 긁어모은 군대를 파견하여 결정적 승리를 거두었다. 그렇지만 아테네 해군의 군사 행동에 위협을 받은 아이기나가 펠로폰네소스 동맹에 가담하였다. [[스파르타]]의 본격적인 개입은 기원전 458년부터였다. 스파르타군은 코린트 만 건너 동맹국인 도리스를 지원하기 위해 바다를 건넜는데, 원정은 성공하였지만 아테네 해군에게 해로가 차단되어 스파르타로 돌아갈 수가 없었다. 일이 이렇게 되자 스파르타군은 오히려 보이오티아[* 지역 맹주로 테베가 있고, 플라타이아이 또한 이곳에 존재했다.] 지역의 타나그라까지 진격하였다. 스파르타의 이러한 대담한 진격이 가능했던 것은 아테네 내부에서 민주정의 전복을 원했던 일부 세력과의 연대, 그리고 보이오티아를 통합하고자 하였던 테베의 지원 때문이었을 것으로 보인다. 예상과 다르게 스파르타군이 아테네로 접근하자 깜짝 놀란 아테네는 군대를 탈탈 털어모아서 결전에 나섰는데, 비록 타나그라 전투에서 스파르타가 승리를 거두었지만 심각한 피해를 입었기에 육로로 철수하였다. 타나그라에서의 패배에도 불구하고 아테네는 기원전 457년 오이노피타에서 테베를 상대로 압승을 거두었고, 테베를 제외한 보이오티아의 대부분을 친 아테네 계열로 바꿔버리는 데 성공한다. 또한 아테네는 도시 성벽을 무너뜨리고, 해군을 해체하며, 델로스 동맹에 가담하는 조건으로 아이기나에게 항복을 받아내었다. 이 시기에 아테네와 아테네의 외항인 피라이오스 사이에 장벽이 건설되었다. 이 장벽은 스파르타의 강력한 육군으로부터 물자의 반입로를 보호함으로써, 아테네의 해군력이 유지되는 한 식량 등의 주요 자원의 수송을 걱정하지 않아도 되게 해주었다. 일련의 군사적 성공으로 고무된 아테네는 함대를 파견해 펠로폰네소스 반도에서 스파르타의 아픈 곳을 여기저기를 찔러대었고, 이는 상당한 성공을 거두었다. 그러나 동시에 벌어진 이집트 원정(기원전 460~기원전 454)이 참패로 끝나자 아테네의 공세는 둔화되었다. 그리스군이 처음 반란을 지원하기 위해 이집트에 도착하였을 때에는 이미 페르시아군이 반란군을 격퇴한 뒤였고, 어물쩡거리던 그리스군은 결국 페르시아군에게 18개월 동안 포위된 끝에 분쇄되었다. 이집트 원정의 참혹한 실패는 델로스 동맹에게 큰 충격을 안겨주었고, 아테네는 이후 몇 년을 외부 원정보다는 동맹이 이탈하지 않도록 내부 문제를 해결하는 데 집중해야 했다. 기원전 451년 친 스파르타 정책으로 도편추방되었던 키몬이 돌아오자, 아테네 시민은 키몬에게 스파르타와의 휴전협상을 맡겼고, 결국 기원전 446년까지 5년 간의 휴전 조약을 조인하였따. 그리스의 분쟁에서 해방된 아테네는 페르시아와 전쟁을 재개하여 키프로스에서 승리를 거두었지만, 함대를 지휘한 키몬이 전사하였다. 휴전 기간에도 아테네와 스파르타 사이에 직간접적인 분쟁은 계속되었고, 그 와중에 기원전 447년 테베가 다시 일어나 코로네아 전투에서 아테네에 승리, 보이오티아 전체를 수복하였다. 코로네아 전투 이후 전황은 도미노처럼 아테네에게 불리하게 돌아갔는데, 먼저 코로네아 전투의 결과로 용기를 얻은 에우보이아에서 반란이 일어났고, 이에 아테네가 대응하기 위해 북진한 사이 이번에는 메가라에서 반아테네 쿠데타가 일어났다. 코린트 지협을 틀어막았던 길이 열리자 스파르타군이 아테네로 진군했고, 아테네군은 본국을 지키기 위해 에우보이아에서 철수할 수밖에 없었다. 메가라를 통과한 스파르타군은 아티카 지역을 휩쓸었지만 적극적인 공세를 취하지는 않고 스파르타로 돌아갔는데, 이는 [[페리클레스]]가 스파르타의 플레이스토아낙스 왕의 조언자 클레안드리다스를 뇌물로 매수했기 때문이라고 한다.[* 이후에 클레안드리다스는 궐석 재판에서 사형을 선고받고 도주했고 왕은 망명하였다.] 스파르타의 위협이 없어지자 페리클레스는 에우보이아로 군대를 이끌고 돌아가 잔혹하게 반란을 진압하였다. 이후 기원전 446년에서 기원전 445년으로 넘어가는 겨울, 아테네와 스파르타 사이에 협정이 타결되어 30년 간의 평화조약을 맺었다. 이때의 평화조약은 기본적으로 양측의 세력권을 인정하고 문제가 발생하면 서로 협의해서 풀어나가자는 것이었다. 이후 양국은 서로 상대방의 세력권이나 동맹국을 건드리지 않고 15년을 지내게 된다. 예를 들어, 기원전 440년 페르시아의 지원을 받은 사모스섬에서 델로스 동맹에 대한 반란이 일어나 아테네가 위기에 빠졌을 때, [[펠로폰네소스 동맹]]은 이 반란이 아테네에게 심각한 타격을 입힐 수 있는 기회라는 것을 알았지만 회합을 열어 개입하지 않기로 결정하였다. 그러나 조약상으로는 30년의 평화였지만 실제로 평화는 15년밖에 지켜지지 않았고, 이후 기원전 431년부터 벌어지는 본격적인 전쟁은 27년간 이어졌는데, 흔히 펠로폰네소스 전쟁이라고 하면 이 27년 전쟁을 뜻한다. 27년 간 전쟁을 하고도 뒤이어 일어난 코린트 전쟁까지 치르자 그리스 [[도시국가]]들은 몰락의 길로 들어서고 말았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